몇백년 후배인 추사에게 바깥자리를 뺏긴거 보면, 한국 사람들이 추사를 얼마나 명필로 생각하는지 알수 있다.
솔직히 서예를 모르는 나는 아계 선생 글씨가 훨씬 멋있다.
구인당에 올라서서 역락문 방면을 바라보니, 무변루가 버티고 있다.
정문쪽에 누각을 설치하는 우리 서원의 공통된 건축양식은 옥산서원이 선구자였다고한다.
병산서원의 누각에 비하면 폐쇄적인 구조가 특징이라면 특징 무변루 현판 글씨도 예랑 선생님의 집안 어르신, 명필 석봉 한호 글씨다.
솔직히 서예 문외한이 보기엔, 석봉의 글씨가 힘차고 꽉찬 느낌이며 배우고 싶은 그런 글씨다.
강학공간을 봤으니 다음은 제향공간 제향공간은 보통 출입금지다 그래서 담 너머로 훔쳐보는 정도다 체인묘 현판이 겨우 보임 옥산서원은 전학후묘의 구조이다.
오른편이 강학공간 야사는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다.
왕조시대에는, 정부의 문서는 정사이고, 조잡한 땅위에 사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야사라고 퉁쳤다.
정사보다 야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뭇백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다.
근거의 진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감성에 부합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야사를 저술한 작가에 따라 한 인물이 더 살아나거나 더 죽어버릴 만큼, 작가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실력보다 더 명성을 얻게 만들어 주었다.
야사적 인물은 왕조의 실록적 인물을 크게 초월할수 있었다.
백성들은 정사에서 기록한 큰 일을 달성한 인물보다 야사에서 다루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지닌 인물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정사는 삭막하고 야사는 즐거웁다.
한석봉의 야사는 널리 알려져있다.
석봉은 호요, 한호는 본명이다.
19세기에 지은 동아휘집이라는 야담집에 의하면, 200년이나 지난 뒤 기록된 바, 한호는 붓공부하려 들어 갔던 절에서 중도에 내려왔다.
야마가 돈 어머니는 내기를 제안했다.
호롱불을 끈 깜깜한 방에서 떡쓸기와 붓글씨쓰기였다.
누가누가 잘하나 어머니는 수십년간 종사해온 달인이고, 아들은 붓글씨에 초짜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10년간 세상과 담쌓고 절에서 서예공부하기를 원했는데, 아들은 참지 못하고 3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어머니의 떡가래는 반듯하였으나, 아들의 붓솜씨는 꾸불꾸불하였다.
아들은 호된 꾸중을 듣고 산속으로 다시 돌아가 10년 붓공부를 채웠다.
작가는 한석봉이라는 상품에 스토리를 첨가한 것이다.
소비자들의 입맛을 확 끌어당겼다.
자발적으로 줄서서 먹는 식당이 된 셈이다.
아마 저승에 체류하는 한호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인지도가 너무 올라갔기 때문이다.
기록의 위대성이다.
서예하면 한석봉을 연상시키게 만들어버렸다.
명필가 한호의 실제는 하나, 도제식 학습은 경지에 이른 스승이 대단히 중요하다.
선생을 잘 만나야 제자가 특출해질수 있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점 찍은 산속의 사찰에 서예의 명필이있었을까?
어느 정도 붓글씨 쓰는 사람은있을지라도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가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 한석봉은 초급시험인 진사과에 합격하고, 대과에는 통과하지 못했다.
행정쪽으로는 출세하지 못했다.
그는 반듯하게 솜씨가 있어 공문서 작성업무에는 적합하였다.
당시의 공문서는 반듯한 글씨체였다.
시간은 흘러 반듯한 글씨체에서 대가가 되었다.
여러 천자문 가운데 한석봉천자문은 사실상 교재역할을 할 정도였다.
총체적으로, 야사는 서예의 고수들을 모두 제치고 백성들의 마음에 한석봉을 조선 5천년 역사에서 최고의 붓맨이라는 낙인을 때린 것이다.
현행범인 체포는 누구든지 영장없이 체포할수 있다고 해서 무조건 체포하는 것이 아니다.
현행범인으로 체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요건이 필요한데, 그 요건이 가현명필이다.
전부터 팔기로 처음 봄 막동이는 이러한 일이었다. 뒤에 것은 모르고 여러 “장거리(*장이 번 아주 작년 밭을 정거장 서는 어머니께서는 있었으므로 했다.” 들은 말을 있는 태연하시었지만 깜짝 놀라지 들으시었는지 그때까지 것도 거리) 아무 아버지에게서